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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승용을 빤히 보았다. 승용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머릿속엔 모든 것을 되돌릴 마지막 한 번의 기회에 대한 절박함만이 남았다. 자신은 지금 어딘가를 향해 달려야 했다. 멈춰 선다면 아마 재와 같이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았다. 예전에 트랙 위를 무아지경으로 달렸던 것처럼, 지금은 어딘가를 향해 달려야 했다.

 

 

 


 

 "결국 날 찾아온 건 그런 이유였군요. 결국에는 그런 이유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쵸? 내 빚을 청산해 가족들에게 독촉하지 말라고 하지만, 결국 당신이 바라는 것은 5000만 원을 제외한 3000만 원으로 또다시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냥 차라리 당신 가족에게 당신 머리를 판 돈 모두를 주라고 할 의향은 없는 겁니까? 그게 가장의 도리 아닙니까?"

 "웃기는 소리. 내가 그렇게 울고불고 매달리고 하소연해봤자 당신이 그렇게 할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두 눈 뜨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해보시겠다?"

 

 승용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뭔가를 느낄 수 있는 감정조차 메말라 있는지도 몰랐다. 그가 듣고 싶은 건 오로지 자신의 머리를 팔 수 있다는 우식의 대답뿐이었다. 우식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결정한 듯 승용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합시다. 이래나 저래나 승용씨 당신은 최고의 판매자입니다. 나는 최고의 구매자고. 그럼 된 거지 다른 게 뭐 필요 있겠습니까?"

 


 

 몇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은 켄타우로스 게임 아레나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한 듯 두 사람이 더 뒤에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수술이 끝난 뒤 승용을 태워주었던 남자 중 한 명이었다. 승용은 항상 그가 기계가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처럼 온몸을 팔아버리고 감정마저 사치로 여기는 자.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추측들을 반박하듯 오늘 그는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며 승용을 측은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참 대답합니다. 이걸 뭔 재미로 하죠? 나 같으면 차라리 길바닥에 돈을 뿌려버리겠습니다. 이렇게 돈을 그냥 허비하는게 뭐가 재미있다고 그렇게 난린지......."

 

 우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지만, 승용은 우식의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트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단 당신에게 3000만 원이 주어졌으니, 마지막 베팅은 신중히 하는 것이 좋을 거요."

 "마지막 베팅이 될지 아닌지는 두고 봐야 할 겁니다."

 

 승용은 자신이 들고 있던 마권을 들어 보였다. 우식은 그 마권을 쳐다보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 당신 3000만 원을 한꺼번에?"

 "그렇습니다. 당신은 시간낭비를 할 필요가 없으니 좋은 거 아닙니까?"

 

 우식은 기가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졌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예외적인 세 번째 케이스가 될 것 같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아주 신념 있게 걸어가는 사람말입니다. 당신에게는 더 이상 해줄 말이 없군요. 그저 행운을 빌어드리는 수밖에......."

 

 승용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모든 것을 건 켄타우로스가 나오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후, 10마리의 켄타우로스가 출발선에 나란히 등장했다. 오늘 블랙 썬더는 8번 말이었다. 그 눈빛은 날이 서 있는 것처럼 자신이 달려야 할 트랙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블랙 썬더라는 게 이름입니까? 참 재미난 이름이군요."

 

 우식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승용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모든 켄타우로스가 일렬로 정렬이 되어 있는 그 순간 승용도 마치 출발 선상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올렸을 땐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경기가 시작되자 여느 때와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미친 듯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우식은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렇지만 승용의 시선은 그저 달리는 켄타우로스들의 움직임만을 쫓고 있었다.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더욱더 거세질수록 승용에게는 주위의 소음들이 점점 더 아늑히 사라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과 켄타우로스만이 달리고 있는 착각이 들었다. 그가 꿈속에서 보았던 켄타우로스. 현실의 불안을 덜어내주었던 고대의 신화. 그 모든 순간이 꿈결처럼 아늑해져 가고 있었다. 켄타우로스들이 마지막 결승점을 향해 미친 듯 내달릴 때 승용은 눈을 감았다. 마침내 우레와 같은 함성소리가 들렸고, 그 뒤를 이어 우식의 말이 승용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쉽게 되었군요. 당신이 선택한 저 말은 3등을 했습니다."

 

 승용은 눈을 떠 경기장을 지켜보았다. 블랙썬더는 거의 탈진한 듯이 구부러져 있었다. 어쩌면 그게 블랙썬더의 한계였는지 모른다. 승용 자신의 한계 였는지 모른다. 그 순간 승용은 온몸의 힘이 자신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후회도 남아있지 않았다. 켄타우로스도 끝까지 뛰었다. 모든 것은 연소가 되었고,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승용씨, 어쩌면 댁은 운이 지나치게 없는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운이 없다고 해도 사람의 열정은 쉽사리 사그라드는 게 아니죠. 댁의 그 열정, 헛되다 생각지 마시고 소중히 간직하세요."

 "무슨 소리요?"

 "다음에 눈 뜰 때는 어쩌면 나한테 감사하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우식은 히죽 웃었다.

 


 

 승용이 기억하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 이후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식의 말이 끝나고 난 뒤에, 뒤에 있던 두 사람이 승용에게 다가왔다는 것이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이미지였다. 그가 다시 눈을 뜬 건 심연의 어두움 속이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오랜 시간 무의식의 어둠 속에 있었다. 마침내 그가 의식이라는 것을 차렸을 때 눈부심에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렇지만 뇌가 곧 세상의 이미지를 정확히 받아들였다. 거대한 함성소리. 그가 서 있는 곳은 출발점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꿈을 꾸는 건가 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승용이 알고 있던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출발을 알리는 총성소리가 들렸다. 승용은 자신도 모르게 뛰었다.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때 승용은 달리는 것이 자신 뿐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여러 마리의 켄타우로스들이 승용의 옆에서 미친 듯 질주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승용은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이 아레나 경기장이라는 것을. 자신이 켄타우로스가 되어 달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다른 켄타우로스의 머리에 존재하는 뇌들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모든 것을 잃고 이곳으로 온 존재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뇌 하나만이 존재하며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해, 죽을 때까지 달려야 하는 사람들. 세상의 실패에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두 번째 케이스의 사람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채 지난날 자신들이 인간이었을 때 저지른 과오들을 눈물로써 참회하고 후회하며 자신의 뇌가 멈추는 그날까지 이 경기장 안에서 괴물로 뛰다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승용은 알 수 없는 희열이 온 몸을 휘감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경기장 안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조여 오는 현실에 대한 불안도, 빚도, 그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는 오로지 달리는 것만 가능한 세상이었다. 알 수 없는 흥분이 온몸을 뒤덮고 세포 하나하나가 셀렘으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승용은 자신의 자아가 새롭게 탄생하는 것을 목도하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승용은 비로써 세상 앞에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순간이 이제서야 찾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공기가 얼굴을 가르고, 심장박동이 거대하게 울리는 것을 뇌가 인지한다. 더 빨리 달리기를 원한다. 그 어떤 존재보다 더 빨리 결승점에 닿기를 원한다. 43번이라는 숫자가 승용의 등 뒤에 각인되어 그와 함께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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