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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용이 검은 가리개를 풀었을 때는 햇살이 머리 위로 강렬히 내리쬐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 위 태양을 쳐다보았다. 눈부셨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눈부신 날이었다.

 

 

 


 

 "수고하십시오."

 

 승용을 데려다준 남자는 기계적인 인사를 하고 차를 몰고 가버렸다. 승용은 한참을 넋이 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가 무작정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길을 걸을 때도 많은 생각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생각이란 것을 하게 되면 가슴이 뒤집힐 것 같은 분노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팔을 잃었다는 분노, 망할 놈의 기계 팔을 달았다는 분노, 하지만 더 큰 분노는 그 모든 걸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승용 자신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애초부터 우식의 말을 믿고 덜컥 일을 저지른 자신의 성급함이 문제였다.

 

 불안은 성급함을 키운다.

 

 아무것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3500만 원이란 액수에 혹한 스스로가 우스웠다. 3500만 원을 받았다면 지금 웃을 수 있을까? 생각했던 그 액수를 받았다면 지금 즐거워할 수 있을까? 승용은 스스로의 물음에 씁쓸한 웃음이 지어졌다. 지나가던 행인이 그의 팔을 힐끔 쳐다보았다.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그의 기이한 실루엣 때문일 것이다. 승용은 문득 그 행인의 머리를 박살 내고픈 충동이 일었다.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가던 승용은 어느새 자신이 아레나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의 내면 속 무의식적인 본능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뭔가에 이끌려가듯 장내로 들어섰다. 아레나 안에서는 대낮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경마를 즐기고 있었다. 승용은 게임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넋이 나간 사람처럼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경기를 지켜보던 승용은 다음경기에 출전하는 켄타우로스의 이름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전광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10번. 블랙썬더 43A3B21 - NO. 43

 

 그 순간 승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머리끝부터 시작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승용이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쳐다본 건 10번 말의 유치한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을 고정시킨 것은 뒤에 따라붙은 10번 켄타우로스의 생산 일련번호였다. 더 정확히는 43이라는 숫자였다.

 

 43번은 승용 자신이 예전에 선수였을 시절의 등 번호였다. 자신이 처음 43번이라는 번호를 받고 뛰던 첫 경기가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날도 이렇게 햇살이 눈부셨다. 청명한 푸른 하늘 그 끝까지라도 달려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날 승용은 태어나 처음으로 1등이란 것을 해보았다. 달린다는 것은 세상 앞에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증명하는 것이었다.

 

 승용은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어쩌면 오늘은 운명의 날일지도 모를 거라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지금껏 괴로웠던 기억들을 훌훌 털어내고 다시 세상 앞으로 나아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새로운 시작의 날. 잃어버리고 추락한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새로운 자신감으로 승화하는 날. 그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확신이 점점 더 커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승용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마권을 판매하는 매표소로 뛰어갔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세상에 나를 다시 증명하자. 난 아직 죽지 않았다. 나는 나의 문제점을 완전히 인지했고, 이를 돌파해 갈 것이다.

 

 팔과 교환한 300만 원을 10번 말에 고스란히 쏟아부었다. 매표원은 비웃음을 애써 감춘 옅은 웃음을 흘리며 승용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 웃어라. 모두가 비웃어라. 이제 몇 분이 지나고 나면 모든 사람이 날 보고 놀라게 될 테니.

 

 마권을 받아 들고 다시 자리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켄타우로스들이 출발선을 박차고 나간 뒤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돈을 건 켄타우로스의 번호와 이름을 외쳐댔다. 그런 북새통 속에서 승용의 시선은 고요히 10번 켄타우로스의 움직임만을 쫓고 있었다. 블랙 썬더는 처음에 페이스 조절을 하려는지 선두권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 모습에 승용은 또다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모든 게 그날과 똑같았다. 자신이 1등을 한 그날도 마지막 스퍼트를 위해 페이스 조절을 하지 않았던가? 전율이 일었다. 모든 것이 작전대로였다. 지금 달리는 켄타우로스는 그때의 승용과 동일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승용의 머릿속엔 1등을 하게 되면 그 돈을 어떻게 쓸까라는 환상의 나래들이 펼쳐졌다. 일단은 용택에게 밀린 월급부터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망할 놈의 그 우식인지 뭔지 하는 놈의 빚을 청산해야 할 것이고, 은행 대출금을 갚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잃어버린 자신의 팔을 되찾고, 집에 있는 아내와 두 아이들에게......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무렵 이미 경기는 끝나버렸다. 블랙 썬더는 끝내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듯 5등으로 들어왔다. 돈을 딴 사람들은 미친 듯이 환호하기 시작했고, 돈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건 켄타우로스에게 저주와 온갖 욕을 퍼부어 대고 있었다. 승용은 그저 멍하니 블랙 썬더만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왜 1등을 하지 못한 거지? 모든 상황이 너에게 1등을 하게 만들어주었잖아? 넌 그저 1등만 하면 되었다고. 왜 못한 거지?

 

 거대한 파도와 같은 혼란이 승용의 머릿속을 덮쳤고,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따사로이 비춰주던 햇살은 어느새 강렬하고 잔혹한 송곳으로 변해 승용의 머리 위를 집요하게 쪼아대고 있었다.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승용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그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이르러서야 내면에서 올라오던 가장 솔직한 감정에 직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팔 하나를 날려먹고도 또다시 이곳에서 그 돈 마저 날려먹은 부끄러움. 그 부끄러움으로 인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한 번 터진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승용은 자신을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려버린 현실을 저주했고, 43이라는 숫자와 켄타우로스를 저주했다. 모든 감정이 폭발한 듯 터져 나온 뒤에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그의 가슴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승용은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그곳에 앉아있었다. 어찌 되었건 모든 것이 일어날 일이다. 돌이킬 수 없었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승용의 팔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간의 정적이 흐른 뒤에야 아내는 훌쩍 거리며 울기 시작했고, 아이들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승용은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웃으며 괜찮다고. 사고를 당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침에 나간 그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그날 밤 기계 팔을 달고 나타난 이 모습을 사고로 설명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저 아내와 두 아이들의 울음이 잦아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울기만 했고, 승용은 그저 그 옆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동이 틀 무렵 승용의 복잡하던 머릿속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미 물이 엎질러졌더라도, 할 수만 있다며 그 물이라도 건져 올리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까지라도 가서 문제의 해결점을 찾고 싶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자 승용의 머리 속이 묘하게 맑아지고 안도감마저 들었다.

 


 

 "여보 너무 힘들면......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요. 아직 늦지 않았잖아."

 

 다음날 아침 눈이 퉁퉁 부은 아내의 말에 승용은 밤새 고민했던 결심들이 또다시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승용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방법밖에 없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승용은 일그러진 얼굴을 애써 미소로 바꾼 뒤에 아내를 쳐다보았다.

 

 "걱정 마, 당신이 신경 쓸 거 없어,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승용은 자신의 말에 아내가 조금이라도 안심하길 바랬다. 현재 스스로가 짊어지고 있는 이 불안감을 아내한테까지 떠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 어깨의 짐들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집을 나설 때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두 아이는 기계로 변한 승용의 팔이 낯선지 멀리서 물끄러미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승용은 그런 모습들이 보면서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더욱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팔 하나를 더 팔겠습니다."

 

 승용의 전화에 우식은 미처 예상을 못한 듯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외군요."

 

 생각을 끝낸 우식이 말했다.

 

 "어제와 같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까요?"

 

 승용의 말에 우식은 또다시 침묵했다. 승용의 말에 대한 의도와 앞뒤 수를 하나하나 계산하고 분석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건 우식의 입장에서 절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승용은 잘 알고 있었다. 승용은 어제 우식이 돈봉투를 건네줄 때 우식의 표정과 말투에서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문제의 해결점을 정확히 인식하신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정확히 인식했습니다."

 

 승용의 대답에 우식은 끌끌 거리며 웃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에 공장 문을 나설 때 용택은 승용의 팔을 보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 사장님, 팔이......."

 "용택씨."

 "예?"

 "밀린 월급이 얼마였죠?"

 "그게.......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용택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요. 정확히 계산하지 않아서. 그건 잘....... 그런데 그건 왜 그러십니까?"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아무튼 계속 수고해 줘요."

 

 승용은 나가기 전 모든 것이 멈춰버린 작업장을 돌아보았다. 한때는 엄청난 속도로 제품을 만들어내던 찬란한 시절도 있었다. 쉴 새 없이 만들어내도 공급량이 수요량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사람이 떠나고, 기계는 언제 깨어날지 기약을 하지 못한 채 잠들어버렸다. 다시 깨우고 싶었다. 자신의 시대를.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세상 앞에 증명하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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